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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사전

불교용어사전 (묘유 – 무량의경)

by 도연스님입니다 2025.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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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사전 (묘유 무량의경)

 

 

#묘유(妙有)---묘유는 진공(眞空)과 짝을 이루는 단어이므로 진공과 함께 논의해야 그 어의에 다가설 수 있다. 진공과 묘유에서 진공(眞空)’은 과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없는 듯하면서 실상 그 속에 있음()을 말하고, 묘유(妙有)는 그것을 뒤집어서 있는 듯하면서 실상은 없는 것을 말한다. , 묘유는 현상적인 것은 있는 것이로되 실상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종이에 산을 그렸다고 하자. 그 그림이 분명 산은 산이로되 또한 산이 아니고 종이와 먹일 따름이다. 헌데 종이와 먹이지만 한편 산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실은 모든 존재가 그와 같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치이다. 그러한 존재원리를 일러 중도적(中道的) 존재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진공이며 묘유이고, 묘유이면서 진공인 것이다.

<반야심경>에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물질이 곧 텅 비어 공한 것이고, 텅 비어 공한 것이 곧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인 것이다. 그래서 물질이 텅 빈 공과 다르지 않고, 텅 빈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진공묘유(眞空妙有) 참조.

묘유 ( 妙有 )

 

#묘행(妙行)---묘행에서 ()’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 하는 말이다.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한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분별없는 무분별의 행을 행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도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무간도(無間道)---불교에서 도()에 이르는 과정은 가행도(加行道)ㆍ무간도(無間道)ㆍ해탈도(解脫道)ㆍ승진도(勝進道)4단계로 나누는데, 가행도는 번뇌를 끊으려고 다시 힘을 더해 수행하는 기간을 말하고, 무간도는 바르게 번뇌를 끊는 도를 말한다.--->사도(四道) 참조.

 

#무간지옥(無間地獄)---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로, 아비지옥(阿鼻地獄) 또는 무구지옥(無救地獄)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이곳에 떨어지면 한 겁() 동안 끊임없이[無間]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이다.

 

#무견(無見)---‘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의 두 가지 견해, 즉 유견(有見)과 무견(無見) 이견(二見)에 대해 세존은 두 견해 모두 모순된 것이므로 버려야 한다고 했다. ‘유견(有見)’<>라는 존재에 집착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으며, 그 실체는 늘 변하지 않는다며 집착하는 생각이다. 이에 비해 무견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일체가 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변견(邊見)이라 하고, 유무견(有無見)에 사로잡힌 견해가 사견(邪見)이다.

부파불교시대의 소승불교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해 중도사상을 여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해 모든 교설이 설해져 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도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파사현정(破邪顯正)]’는 것이었다. 즉 유견이 아니면 무견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 <중론(中論)><대지도론(大智道論)>을 저술해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사상을 천명했다.--->유견(有見) 참조.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죄나 허물을 소멸시켜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진언(眞言)을 설한 경전이다. 다라니경이란 탑을 조성한 다음 불경을 염송함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경전(기도문)으로서, 탑 속에 이를 수납해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나라 측천무후 말년인 704년에 서역 도화라국(覩貨羅國)에서 온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법장(法藏) 스님과 함께 한역(漢譯)했다.

19661013일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 보수할 때, 2층 탑신에서 금동 사리함이 발견됐다. 이 사리함 안에 여러 사리 장엄구와 함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들어 있었다. 이 다라니경은 일본에서 770년에 간행된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의 목판본보다 20년가량 앞서는 것으로서, 751년 신라 경덕왕 10년경에 간행된 목판인쇄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이라 인정받고 있으며,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있다.

 

#무기(無記)---무기에는 다음 세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는 붓다의 침묵을 무기(無記)라 한다. 석가가 다른 종교가(외도)로부터의 형이상학적 10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하고 기답(記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세계의 공간이 유한한 것인지, 아니면 무한한 것인지, 또는 여래는 사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이와 같 은 외도(外道)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이를 무기라고 한다. 무기의 이유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의 인식과 경험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으며, 또 비록 해결했다 하더라도 불안ㆍ고뇌의 해탈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 인간의 사유와 이성적 판단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희론(戱論)은 말장난에 불과하다.--->14무기(十四無記) 참조.

다른 하나의 개념은 선악을 가리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과 무기의 3()으로 구분하는데, 이 중 무기는 선악의 분별이 없는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 흑백 등의 상태가 분명한 것을 유기(有記)라고 하고, 선ㆍ악이라고 분명히 규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따라서 유기의 선과 악에는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따르지만, 무기에 대해서는 어떤 과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기의 업()에 대해서는 자성(自性)에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무기업(無記業) 참조.

또 하나 참선 중에 화두를 망각하거나 화두를 놓친 상태를 말한다. 참선을 할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주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망각한 상태를 무기공(無記空)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무기에 빠졌다 라고도 한다.--->무기공(無記空) 참조.

 

#무기공(無記空)---무기공에도 두 가지 개념이 있다.

무기공(無記空)은 참선 중에 화두를 망각한 상태, 화두를 놓친 상태를 말한다. 참선을 할 때 아주 고요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망각한 상태를 무기공이라 해서 예로부터 무기(無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또 하나 무기에 빠진다는 것은, ()에 집착한 나머지, 공에만 머무르려는 것이다. ()사상에 집착해서 생각이 일어남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음을 무기공이라고 한다. 진정한 공이라는 것(무기공은 진정한 공이 아님)은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므로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머물지 않는 마음이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에 온갖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그 변화무쌍한 생각과 마음을 분별치 아니하고 받아들이고 흘러 보내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진정한 공이라고 한다.

 

#무기업(無記業)---삼성업(三性業) 중의 하나. 선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惡業), 선도 악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어 이를 삼성업(三性業)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 행위가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과보를 낼 수 있는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비선비악(非善非惡)의 무기업(無記業)은 무의도적 행위로서 윤리적으로 중성적인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행위이다. 따라서 과보를 낼 수 없고, 선악의 어떤 결과도 받지 아니하는, 윤리적인 척도로 해석할 수 없는 업이다. 선악의 어느 쪽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인간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란 무의식적인 행위, 아무 뜻 없이 하는 행위를 말하며, 이것이 무기업이다.--->() 참조.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핵심내용임. 육조단경에는 무념(無念)을 세워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을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생각하며 대상과 접촉하는 작용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작용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지 바른 생각이 없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무상(無相)에서 은 망념으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즉 우리들의 생각인 상()이 마음 밖의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그것이 상()이다. 그리고 무상이라는 것은 상 속에 있으면서도 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차별상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 차별상을 공()으로 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본디 무상이다. 상은 모두 망상에 물든 마음이다.

무주(無住)란 양극단 중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는 집착이 사라지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생각이나 어느 찰나에 머물면 그것을 속박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법에서 어떤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면 속박이 없으니 그것이 무주이다. , 이어지는 온갖 대상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 무주이다. ()에도 불공(不空)에도 머물지 않는 그것이 바로 모든 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디 성품이다.

 

#무드라(手印, 산스크리트어 mudra)---불교에서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조각상과 탱화(幀畵)에서 보이는 손 모양들을 말한다. 손과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수많은 상징적 모양이다. 한자로 수인(手印), 인상(印相), 인계(印契)’ 등으로 변역 한다. 조각이나 그림의 경우, 손의 자세는 그 인물의 특성이나 그와 연관된 중요한 일화를 상징한다.--->수 인(手印) 참조.

 

#무량광(無量光)---무량광의 광의는 진리를 크게 깨친 사람의 지혜의 광명은 한량없이 많아서 이 세상을 다 비추어 주고, 아무리 오래 비추어도 다함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이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협의로는 아미타불의 광명을 뜻한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그 수가 극히 많아서 수량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 공덕은 한없이 커서 삼세에 이르도록 다 함이 없기 때문에 무량광이라 한다. 이래서 아미타불을 무량광불이라 하지만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아미타가 원래 아미타브하(Amitabha무량광) 및 아미타유스(Amitayus무량수)라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량광은 늘 한량없는 수명이라는 무량수(無量壽)와 함께 말해진다.--->아미타불(阿彌陀佛) 참조.

 

#무량수경(無量壽經)---<무량수경><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을 합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됐던 경전이다. 서기 100년경 북인도에서 만들어진 이 경의 한역본 중 우리나라에 널리 유포된 것은 동진(東晋)의 각현(覺賢)과 보운(寶雲)421년에 번역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정토사상을 주제로 설법한 것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량의(無量義)---‘무량의<법화경>에 등장하는 말이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무량의(無量義)에 대해 무량(無量)의 의()는 일심(一心)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무량의 의라는 뜻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중생을 가르칠 때에는 듣는 사람의 근기나 시기, 생활환경 등에 따라 온갖 방편을 다하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한량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량의 의라고 한다. 그러니 여기서 한량이 없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방편설법인 팔만사천 법장을 말한다.

 

#무량의경(無量義經)---법화 삼부경의 하나. <무량의경><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보현관경(普賢觀經)> 을 합해 법화삼부경이라 한다. <무량의경>은 법화경의 개경(開經), 곧 서설인데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기에 앞서 설하신 것이므로 지금에는 법화경을 읽을 준비단계로서 무량의경을 읽은 다음에 법화경을 읽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인도 승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陀耶舍)가 남조의 제()나라시대인 481년에 번역한 것이 전하고 있는데,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했다고도 하고 중국에서 지은 것(위경)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