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사전 (무생법인 – 무위진인)
#무생법인(無生法忍)---<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三法忍)의 하나이다.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삼법인.
신인(信忍)은 신심에 의해 얻는 지혜,
순인(順忍)은 진리에 순종하는 지혜,
법인(法忍)은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서, 이 법인을 무생법인이라 한다.
여기서 인(忍)은 ‘참을 인’이 아니라 인가결정(認可決定)ㆍ인지(認知)의 뜻이니, 진리를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것. 혹은 진리를 확인해 결정적으로 이해하는 일을 말한다. 줄여서 무생인(無生忍)이라고도 하는데, 무생법인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일체법들이 태어남도 머무름도 사라짐도 더러워짐도 깨끗해짐도 늘어남도 줄어듬도 없다. 도무지 잡을 것이 하나 없다는 말이다.
이상의 대승불교에서의 무생법인에 비해 부처님 원음에서 말하는 무생법인이란 법들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보아 갈애와 집착을 여읜 것을 말한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아 마음이 끄달리지 않으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불생이고 무생이다.--->삼법인(三法忍) 참조.

#무설설(無說說)---말 없는 가운데 말이 있다는 것이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설법해도 모르는 이 야기이니 말없이 설법을 하는 침묵의 소리를,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만 체득이 가능하리라. 말이 많다고 의사가 통하는 것이 아니며 설법 없이도 통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장장설(廣長說)의 반대되는 말이다,
#무설설불문문(無說說不聞聞)---말하는 바 없이 말하고, 듣지 않음으로 듣는다는 뜻. 말이 없는 가운데 말이 있으니 무언 중 이심전심으로 전해들을 줄 알아야 한다.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말이 무설설이고, 이심전심으로 듣는 것이 곧 불문문이다.
저 뜨락의 굵직한 소나무들은 설함이 없이 설하고,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삼층석탑이 토해내는 사자후는 어떻고, 담 밑의 갖가지 꽃들도 화엄세계의 장엄법문을 하고 있으라. 중생의 어리석음으로 제불의 미묘 법문을 듣지 못하니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만 법비[法雨]를 담는다.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도선(道詵)국사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에서 수도하던 혜철(惠徹)도인을 찾아가서 그에게서 "무설설 무법법"을 화두로 받아서 불철주야 고행한 끝에 확철대오 했다. 무설설(無說說)은 말 없는 가운데 말함이고, 무법법(無法法)은 법 없는 가운데 법을 말한다. 말없는 말, 또 말을 하고도 말 한 바가 없는 무설설은 무법법의 ‘법 없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무법이 법이며, 곧 법이 법이 아닌 것과 같은 ‘무법법’의 도리다. 결국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참다운 진리는 말로써-알음알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다면, 그걸 알음알이로는 이해할 수 없고,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무소득(無所得)---<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로서 산스크리트 시마티가(simatiga)를 번역한 말인데, 무소유(無所有)라고도 하며, 집착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용어로는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단순하게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 모자람도 없고 궁색함도 없어 집착(번뇌)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얻을 바가 없는 공의 경지에 이르면 곧 깨달음을 성취한 경지이다. 무소득은 일체가 공(空)이기 때문이다.
#무소득공(無所得空)---불가득공(不可得空), 부단공(不但空), 필경공(畢竟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말.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空)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 Dharma)라는 관념도 없다.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이를 무소득공(無所得空) 또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고 한다.
#무소작(無所作)---짓는 바가 없음이다. 무엇인가 짓는 바가 없으니 업(業)을 지을리도 없다. 연기법에 따라 짓는 바가 없고, 욕심으로 인한 머무르는 바도 없으니[무주(無住)], 번뇌 망상이 일 것도 없고, 아무런 죄업도 짓지 않는다. 이는 곧 공(空)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다.
#무심선(無心禪)---무심선은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하되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과 달리 일체의 망념(妄念)을 여읜 진심(眞心)인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계로 삼는 선법이다. 즉 무심의 경계를 위해서 참선하는 것이 무심선이라 하겠다. 이는 중도사상(中道思想)에 입각한 것이고, 연기적 생명의 실상에서 무아(無我)를 체득해 가는 선이 다.
즉, 무심선은 의식(意識)을 벗어나고 범부의 길이나 성인(聖人)의 길을 벗어나서 무위(無爲)와 무심(無心)으로 면밀하게 양성해 자연히 도(道)와 합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평상심이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은 이러한 무심선의 생활적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무심선은 중국의 석옥청공화상(石屋淸珙和尙)과 고려말 우리나라에 다녀간 적이 있는 인도의 지공(指空)선사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고려 말의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저술했다.
#무아(無我, anatman)---무아는 아상(我相)에 반대되는 말이다. 아상이란 ‘나’를 내세우고, ‘나’란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무아란 불변의 실체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인간관이다.
헌데 부처님께서 무아를 설하지 않으면 안 됐던 이유는 인생의 괴로움의 대부분은 집착에서 오기 때문이다. 집착이란 무엇에 얽매이는 것이고, 이 집착의 근본에 있는 것이 ‘나(我)’에 바탕한 집착이다. 아상(我相) 혹은 ‘나(我)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혹은 ‘아견(我見)’, 이와 같은 나(我)에 바탕을 둔 견해나 욕망에 의해 집착이 시작되고, 인생의 괴로움이 시작된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도 ‘아상’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따라서 수행을 하든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하든 우선적으로 아상부터 타파해야 한다.
헌데 공교롭게도 ‘나(我)’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나(我)를 연마하는 것이 되고, 나(我)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행의 방향이 부처를 향해 간다면 그것은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것이고, 내(我)가 없어져 가는 방향이 되기도 한다. 또 이타(利他)를 향하는 수행이라면 이것도 또한 결국은 나(我)를 없애가는 방향이다.
그러나 무아의 상태는 성자의 수준인 아라한(阿羅漢, Arhan) 이상의 수행에서 가능할 정도로 매우 높은 경지이다. 무아가 되면 남과 나의 경계가 없어지고 ‘나’란 존재가 사라진다. 그 정도가 되면 번뇌를 완전히 여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경지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미국의 저명한 배우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리처드 기어(Richard Gere)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사람이 행복하려면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 상대의 기대가 충돌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모두가 행복하려면 내가 없으면 된다. 생활 속에 무슨 일을 할 때 가능한 한 ‘나’ 없이 하려고 해야 한다. 나를 내세우지 않은 무아의 바탕 위에 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 보살심이 없다면 우리가 수행을 통해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다고 해도 전혀 도움 될 것이 없다. 그건 결국 자신의 에고만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리처드 기어의 이야기가 무아와 전혀 별개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다만 부처님 말씀의 진의를 진제(眞諦)라 한다면 이 이야기는 속제(俗諦)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진제로서의 무아의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와 같은 속제의 수준에서의 무아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이 세상은 참으로 부드러워질 것이다.
#무언통(無言通, ?-826)---월남(베트남) 선종(越南禪宗) 무언통파(無言通派)의 초조(初祖). 원적은 중국 광주(廣州)이다. 성품이 염정과언(恬靜寡言)했지만 견해가 뚜렷하고 트여서 사람들이 ‘무언통’이라 불렀다. 일찍이 백장회해(百丈懷海) 문하에서 배웠고, 개오한 뒤 광주로 돌아와 화안사(和安寺) 주지로 있었다. 820년 월남으로 가서 건초사(建初寺)에 주석하고, 하루 종일 면벽좌선했다. 몇 년 뒤 제자 감성(感誠)이 그 법을 이었다. 이로써 월남에 선종이 널리 퍼져 선종의 한 파를 형성했고, 이것이 ‘무언통파’이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열반에 대해서는 2열반ㆍ3열반ㆍ4종 열반 등의 분류가 있다. 그 중 4종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ㆍ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ㆍ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ㆍ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이다.
이 중 무여의열반은 줄여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도 하는데,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며, 반열반(般涅槃, parinirva), 대반열반(大盤涅槃)이라고도 한다. 죽은 후에 번뇌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들어가는 열반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모든 분별이 완전히 끊어진 적멸(寂滅)의 경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무여열반이야말로 참 해탈이어서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유여열반(有餘涅槃), 무주처열반(無主處涅槃) 참조.

#무염(無染, 801∼888)---신라시대의 승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며,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2세에 출가해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됐다.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법성은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줬으며, 당나라 유학을 권고 했다.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가서 선법(禪法)을 익혀 돌아와서 선문9산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가 됐다.
89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이라 했다. 탑은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 주리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곤(崔仁滾)이 쓴 탑비는 현재 국보 제8호로 지정돼 있다.
#무외시(無畏施)---불가에서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를 삼보시(三布施)라고 한다. 그 중 무외시는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보호해 두려운 마음을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무외시를 베푸는 자를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한다. 무외시는 소극적 관점에서 내가 주변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이요, 적극적 관점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가진 것, 아는 것, 하나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외시이다. 얼굴 표정을 밝게 하는 것, 따뜻한 말 한 마디, 칭찬 한 마디 등 남을 대할 때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 는 것이 바로 훌륭한 무외시가 될 수 있다.--->무재칠시(無財七施) 참조.

#무위법(無爲法, 범어 asamskrta-dharma)---무위법이라 하는 것은 유위법에 반대되는 말로서, 조작(造作), 위작(爲作)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위(爲)’는 무언가 하려고 하는 의지를 뜻한다. 따라서 유위란 마음먹고 행하는 의지적 작용(爲作)을 가리키며, 생멸(生滅)ㆍ변화의 원인으로서 업을 만드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이에 비해 무위법은 조건에 지배돼 생기는 유위에 대해 ‘함이 없는’, 원인 조건을 초월한 형태를 이름인데, 온갖 분별과 망상이 끊어져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즉, 생멸ㆍ변화가 없는 진리의 세계, 의식의 지향 작용이 소멸된 상태에서 직관으로 파악된 현상.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탐(貪)ㆍ진(瞋)ㆍ치(癡) 삼독심(三毒心)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무위법이란 말로써 나타낼 수 없는 법의 본성으로서 남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가설로서 명칭을 붙인 용어이다. 즉,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적으로 명명한 말이고, 유위법으로 살아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 무위법이라는 반대말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유위법은 번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하는 일체법을 뜻하는 이름이고, 무위법은 번뇌가 하나도 없이 하는 일체 법을 뜻하는 이름이다.--->유위법(有爲法) 참조.
#무위진인(無位眞人)---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해탈을 이룬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일컫는데,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도를 닦은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 즉 자리(지위) 없는 참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왜 자리가 없는가. 그 사람을 어떻게 경계 지을 수 없고, 어떤 모습으로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교 사상을 차입한 격의불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무의도인(無依道人)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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